탈북자 신분에서 16년 만에 준종합병원장이 돼두 차례의 탈북, 수 차례의 죽을 고비 넘기고도 환자 돌보기에만 매진가족 같은 환자 위해 최고의 병원 시설 마련
  • 탈북자 신분에서 대한민국 준종합병원장이 된 조수아(46) 부산 일광 서울병원장. 조 원장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북한 상위 1%의 유복한 집안에서 의사로 살아오다가 한순간 북한 수용소 시체 더미 속에 파묻혀 생활해야 했던 그녀다. 두 차례의 탈북과 중국, 몽골 등을 오가며 죽음의 문턱에 수차례 드나들어야 했던 그녀는 한국에서도 온갖 굴곡진 삶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작은 체구지만 이제는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조 원장은 시련과 고난에 대한 아픔을 뒤로하고 대한민국 의사로서,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지역에서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다음은 조 원장과의 일문일답.

    -어떻게 대한민국 의사가 됐는가?
    “북한에서 본래 임상의학부 의사였다. 임상의학부는 우리나라에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를 말한다. 한국에 들어온 뒤 간첩이라는 온갖 누명을 벗은 뒤 대학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처음에는 막막하고 힘들었다. 정보가 없었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보니 어떻게 로드맵을 잡아야 하나 막막했지만 일단 부딪혔다. 

    -탈북자 신분으로 의대 공부를 이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생활하다 보니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주유소 아르바이트부터 식당일, 공사장 일용직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 한국에서 다시 의료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의사가 되기 위해 우리나라 모든 의대에 직접 찾아가고, 전화해서 입학 문의를 해봤다. 그런데 해당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영어 토익, 토플 점수 등이 있어야 한다더라. 문제는 내가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결국 알파벳부터 달달 외워서 서울대학교 대학원 가정의학과에서 공부하게 됐다”

    -북한에서 배운 의학 지식이 있을 텐데, 어렵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겠다.
    “아니다. 의학 용어 때문에 큰 애를 먹었다. 북한에서는 러시아어로 의학 용어를 공부했다. 한국은 영어가 기본이더라. 그래서 다시 배우는 것과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는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응용문제 등이 많아 시험 등을 치를 때 적응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악착같이 공부해 과정을 모두 마쳤다”

    -북한에서도 소위 잘 나가는 의사였다고 들었다. 탈북 계기가 궁금하다.
    “의사로 활동하면서 모범 동무로 불릴 만큼 잘 지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군 고위직 간부이다 보니 유복한 환경에서 지냈다. 그러다 김일성이 죽고난 뒤 병원이 텅텅 비는 시기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들이 굶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데, 국경 넘어에 있는 중국은 화려한 내온사인이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굶는데 저들은 잘 사는건가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젊은 혈기에 친구들과 중국을 다녀오자고 하고 강을 건넜는데, 그 과정에서 친구 3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 1년 반을 중국에서 떠돌아야 했고, 결국 자수를 하고 북으로 돌아갔다. 이후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시쳇더미 속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북한 수용소에서는 어떻게 탈출했나?
    “청진에 수성교화소라는 곳에서 50년 형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개처형이 잡혔다. 수용소 생활은 끔찍했다. 같은 공간에 시체가 쌓여 있었고, 쥐가 내 종아리를 뜯어먹는 등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잡혀 있는 수용소에 친오빠 친구가 근무 중이었는데, 가족들에게 내 상황을 전달해준 것 같더라. 결국 오빠가 여러 명분으로 돈을 주고 병보석을 시켜줬다. 이후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20여 일을 혼수상태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창문을 통해 뛰어내린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중국으로 다시 넘어갔다”

    -중국에서 다른 나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한국으로 오게 된 계기가 있나.
    “한국으로 올 생각은 아예 없었다. 중국에서 가짜 신분증으로 중국인으로 숨어 살았다. 그러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깐 중국어를 배워 진료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병원에서 유일하게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알다 보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리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내게 통역을 부탁하더라. 그러다가 횟수가 잦아지고, 결국 통역회사를 차리게 됐다.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집도 사고했는데, 누군가 밀고를 하더라. 그래서 집도 빼앗기고 쫓겨나듯 도망쳤다. 이후 한국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몽골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통해 귀화 신청을 하게 됐다”

    -귀화 과정에서 사건,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다.
    “몽골에서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가달라고 했는데, 운전기사가 북한 대사관으로 가더라.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북한 대사관에서 한국대사관이 멀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한국대사관으로 뛰어가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이 쳐다도 보지 않더라. 그래서 초소에 근무하는 한 간부의 총을 빼앗고, 허공에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내가 군에서 태권도 8단을 따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놀란 한국대사가 밖으로 나왔고, 나는 한국대사 얼굴을 보자마자 쓰러졌다”

    -한국에서 정착한 지 16년 차다. 빠른 성공을 거둔 듯 보인다.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자본주의를 알아갔다. 무엇보다 남들보다 2~3배 이상도 안 되고, 10배 이상 노력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왔다. 의사 면허가 나온 뒤에는 페이원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3년 동안 365일 일만 했다. 1주일에 5개 병원에서 죽기 살기로 일을 하기도 했다. 낮에는 성형외과에서, 저녁에는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새벽에는 병원 당직 의사로 일하고, 주말에는 정신병원에서도 일했다. 그러다 산후조리원도 운영해보고, 산모 도우미 관리 사업도 해봤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진료 과정에서 환자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북에 있는 가족이 아주 그립다. 환자들을 보면 엄마 같고, 아빠 같고, 오빠 같다. 그들에게 가족을 대하듯 하게 되더라. 마음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진료할 때도, 약을 처방할 때도 세세하게 꼼꼼하게 설명하게 되더라. 또 현재 병원에 암 환자들을 위한 병실을 마련했는데, 산소도 나오게 하고 황토 침대를 깔고, 바닥에 온돌도 깔게 됐다. 무엇보다 환자들이 먹는 음식도 유기농으로만 사용한다. 사람들이 뭐하러 비싼 돈 들여가면서 병원을 운영하냐고 하는데, 내 가족들이 치료받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앞으로의 포부나 계획이 있다면?
    “부산 기장에 정착했으니, 군민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리를 더 잘 잡게 된다면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지역이나 병원이 없는 곳에 병원을 지어 내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계속해 봉사하고 싶다. 또 해외에도 의료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 짓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계속해 이어가고 싶다. 따뜻한 의사로 기억될 수 있도록 많은 나눔을 실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