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으로 야구선수 꿈 포기…'악바리 근성' 학업 몰두침구류 회사 사회생활 첫발…일머리 키우며 창업의 길반복적 문제해결 '강점'…국내 유일 카펫 제작 CEO 거듭
  • ▲ ‘국내 최초의 카펫 직물기술 기업 수장’ 유성열(54) 더얀 대표. ⓒ천의현 기자
    ▲ ‘국내 최초의 카펫 직물기술 기업 수장’ 유성열(54) 더얀 대표. ⓒ천의현 기자
    “문제에 부딪혔을 때 후회하지 않을 만큼 반복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다 보니 지금의 결과를 마주하게 됐습니다”

    ‘국내 최초의 카펫 직물기술 기업 수장’ 유성열(54) 더얀 대표는 늘 진취적인 행보로 주변인들을 놀라게 한다.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 있는 국내 모든 원단과 실을 카펫 원재료로 사용하는 실험을 거듭해 색을 구현하고, 매번 새롭고 트랜디한 디자인을 선보이면서 카펫 시장에서 ‘국내 유일’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그다.

    그 결과, 기술력을 인정받아 국내는 물론 해외 굴지의 기업 등에서 지속해서 제작 수주를 따내고 있다.

    유 대표는 “20여 년 전 국내에 카펫 제작회사를 찾아보니 단 한 곳도 없었다. 대부분 해외에서 유통해왔다”라며 “20년이 지난 현재 우리 회사의 기술력이 인정받고 해외로 역수출할 수 있어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유 대표는 최근 회사 20주년을 기념해 특별한 행사를 기획했는데, 그 취지와 과정도 눈길을 끈다.

    다양한 직종 종사자들을 초청해 카펫을 제작케 한 뒤, 카펫 판매 수익금을 국내 청소년들을 위해 전액 기부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 4월부터 방송인 노홍철, 마라토너 이봉주, 의사 김병후 정신과의원장 등 다양한 직종 종사자 315명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내 행사에 참여케 하고, 본인의 카펫 제작 노하우를 전수했다.

    또, 카펫 제작과정에서 참여자들의 인터뷰도 진행해 청소년들이 다양한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영상을 제작 중이다.

    해당 카펫 판매 행사는 지난 16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여의도 더현대 서울 지상 5층에서 진행되고 있다.

    유 대표는 “돈을 떠나서 의미 있는 날, 의미 있는 것을 해보고 싶어 지난 10여 개월간 주말도 반납하고 매일 다양한 직종 종사자들과 카펫을 만들었다”며 “가위질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손가락이 못 움직일 지경이지만 마음만은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의 성공 뒤에는 특이한 이력과 특별한 발자취가 있었다.

    유 대표는 본래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엘리트 야구선수였다. 눈치가 빨랐던 그는 스스로 타고난 선수가 아닌 노력형 선수라는 것을 초등학생 때부터 인지하고 자랐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선수 생활 당시 큰 부상을 입었다. 야구공에 중지 손가락을 맞은 뒤 골절이 된 것이다. 야구선수에게 있어 중지 손가락의 역할이 크지만, 선수 선발에 영향을 받을 우려 때문에 유 대표는 이를 숨기고 훈련에만 매진했다. 이 때문에 중지 손가락은 꺾여져 있는 상태로 굳어져 평생 중지 손가락으로 야구공을 던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삼루수였던 그에게 있어 큰 장벽의 장애물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들보다 많은 공을 던지고 연습하는 ‘악바리’ 근성으로 야구 명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잇달아 입학하고, 야구선수로서 대학까지 진학했다.

    유 대표는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나지 않았던 상황에서 손가락마저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보니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공이 땅에 내려꽂히기 일쑤였다”며 “이 사실을 감독님들이 알게 되면 시합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평생 비밀로 했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 때가 되자 더는 야구선수로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학업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야구를 그만두고 강의실로 향한 그는 학업도 훈련처럼 ‘악바리’ 근성으로 했다.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녹음기를 틀어놓고, 반복적으로 들어야 수업 내용이 이해됐던 그다. 80년대 엘리트 야구선수에게 있어 높은 학업의 문턱을 넘는 방법은 반복 학습이 유일했다. 그 결과, 높은 학업성적을 거두고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배경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당시 유 대표의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다. 야구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부모님에게 공부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방법이 필요했다. 그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누구보다 장학금이 절실했던 그는 담당 지도교수를 찾아가 “야구선수 출신이 이 정도 성적을 거뒀으면 장학금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장학생 선발 때 자신을 추천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삶을 개척하는 데 있어 그의 적극적인 기질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유 대표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도교수가 내 시험지는 쳐다도 보지 않고 그냥 장학금을 주라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며 “정말 고마운 일은 그 계기로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나 역시 학업에 몰두하고 새로운 길을 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유 대표는 침구류 유통회사에 입사하며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곳에서 그는 백화점 입점 지점과 직원들을 관리하며, 소위 말하는 ‘일머리’를 키우기 시작한다. 특히 학창시절 야구부 단체활동을 하며 선수들을 관리하던 일 등이 이곳에서 도움이 돼 직원 관리가 수월했다. 무엇보다 그의 특유의 적극적인 성향으로 원활한 업무 교통정리가 이뤄지면서 회사에서 ‘우수’ 사원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유 대표의 이 같은 업무 성과는 동종업계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는 지금의 회사 ‘더얀’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 카펫 유통회사로 스카웃이 됐다. 이곳에서도 유 대표는 발로 뛰어다니며 카펫 판매점들의 ‘요구’를 관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판매 현장에서 필요한 것들과 공급되고 있는 제품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됐다. 그는 이에 대한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에는 카펫을 제작해 공급해주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이 고민은 유 대표가 스스로 현장이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회사를 만들고 창업의 길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됐다.

    유 대표는 “판매 현장을 가면서 느낀 것은 정작 저들이 필요한 것은 별도로 있는데, 해외에서 가져온 물건을 일방적으로 가져다주니 뭔가 충족이 되지 않는 것을 느꼈다”며 “그래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지금의 회사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창업 첫 달 매출은 1700만 원에 달했다.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적지 않은 거래 규모다. 카펫 1장 값이 적게는 90만 원, 많게는 120만 원에 달했지만, 판매는 폭발적이었다. 더얀의 성장 속도는 매서웠다. 하지만 핸드메이드 방식의 수작업으로 많은 주문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유 대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찾다가 독일과 스웨덴에서 카펫 제작 로봇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당 로봇을 국내 최초로 들여오게 된다. 이후 많은 양의 주문량을 소화할 수 있게 됐고, 지금의 생산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그는 “창업 초기에는 새로운 시장이다 보니 우후죽순 경쟁사들이 나타나 유사품을 만들어 싸게 파는 방식으로 우리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더라”며 “하지만 우리 회사는 품질에 집중하고, 그들이 내놓을 수 없는 새로운 디자인을 계속해 개발해나가면서 위기를 극복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20년을 회고해보니,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뒤돌아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 반복적으로 실험하고, 도전에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임하다 보니 문제가 해결돼왔던 것 같다”며 “앞으로는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해외 등 글로벌 시장에서도 우리의 기술력이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