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더 마더'서 안느 역 맡아29일~6월 7일 예술의전당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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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더 마더(THE MOTHER)'에서 ‘안느’ 역을 맡은 배우 정애리. ⓒ천의현기자
빨간 드레스를 꺼내 입은 한 여자가 텅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있다. 평생을 ‘아내’와 ‘엄마’로만 살아온 그녀에게 어느 날 묻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게 다 뭘 위해서야?”오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극 '더 마더(THE MOTHER)'는, 영화 '더 파더'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은 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가족 3부작’ 그 출발점이다.그리고 그 중심에, 데뷔 48년 차 배우 정애리가 ‘안느’라는 낯설고 위태로운 얼굴로 선다.수많은 안방극장에서 ‘따뜻한 어머니’로 기억돼 온 그를 무대 위에서 만났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그가 보여주려는 건 정확히 그 익숙함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작품 이야기에 골몰했고, 한 인물의 붕괴를 어떻게 하면 가장 진실하게 전할 수 있을지를 거듭 곱씹었다. 다음은 일문일답.Q. 연극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들었다. 실제로 얼마 만인가.A. 마지막으로 뮤지컬 무대에 섰다가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따져보면 거의 19년 만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무대에 다시 선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일이다.Q. 그 오랜 공백을 깨고, 그것도 연극을 택한 이유가 있나.A. 이 작품 제안을 받은 게 사실 2년도 더 됐다. 대본을 받자마자 ‘중년을 넘어가는 여성 배우로서 꼭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른 작품들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이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극장 사정 등 여러 가지가 맞물려 결국 올해 무대에 올리게 됐다. -
- ▲ 연극 '더 마더(THE MOTHER)'에서 ‘안느’ 역을 맡은 배우 정애리가 대본 리딩을 하고 있다. ⓒ천의현기자
Q. 연출을 맡은 이강선 연출은 “관객이 믿고 있던 정애리의 익숙한 얼굴이 조금씩 흔들리고 균열되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 표현이 불편하진 않았나.A. 맞는 말이다. 안느는 한 가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어떤 분은 나를 자유로운 엄마로 기억하고, 어떤 분은 카리스마 있는 회장님으로, 또 어떤 분은 따뜻한 어머니로 기억하실 거다. 그런데 안느 안에는 그 여러 얼굴이 한꺼번에 나온다. 우리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니까, 그게 바로 ‘균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Q. 그렇다면 안느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고 접근했나.A. 미리 선을 긋지 않으려 했다. 내가 만든 안느가 아니라 ‘대본 속에 그려진 안느’를 그대로 따라가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따라가 보니,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열려 있더라. 연극은 살아 있는 무대다. 그날그날 객석과 호흡하면서 조금씩 다르게 살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올라서도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다.Q. 큰 틀에서 안느는 어떤 사람인가.A. 이 작품의 마지막 대사가 ‘그게 다 뭘 위해서야’다. 평생 가장 애를 많이 썼고,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고, 그것이 아니면 죽을 것 같아 붙잡고 있던 것이 결국 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렇게 묻는 거다. 나는 그 질문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으로 잡고 싶었다. ‘다 소용없어’가 아니라, ‘그래, 그럼 이제 나를 한번 찾고 시작해 보자’ 쪽으로.Q. 그럼 희망적인 결말인가.A. 나는 그렇게 가고 싶다. 끝까지 마냥 밝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 그랬지만 그래도 한 발을 내디뎌 보자’는 마음. 나는 그 마음으로 안느의 마지막을 그리고 싶다.Q.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을 마주해 왔다. 안느의 그 마지막 깨달음이 배우 본인에게도 공감되나.A.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든다. 미리 알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사람이 대개 그러질 못한다. 그러지 못하다가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다고 본다. 모든 시간을 다 통과해서 지금의 나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안느도 그만큼 많이 아렸던 사람이기에, 오히려 그 아렸던 만큼 더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Q. 봉사 활동도 오래 해왔고 책도 썼다. 평소엔 내면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채우는 삶을 살아온 듯한데, 안느는 정반대 방향처럼 보인다. 두 세계를 오가는 감정이 어렵진 않았나.A. 사람 정애리는 사람 정애리고, 안느를 연기하는 정애리는 또 다른 안느다. 그렇게 감정이 구분돼야 한다. 안 그러면 큰일 난다. 물론 계속 안느를 연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예민해진다. 하지만 그걸 일상까지 끌고 오면 너무 힘들다. 연습실에선 안느로 있되, 집에 돌아오면 또 나의 삶을 살아야지. 그래도 솔직히, 안느로 있는 시간이 쉽지는 않다.Q. 관객이 꼭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안느의 절정’ 같은 장면이 있다면.A. 중간중간 ‘어, 왜 저러지?’ 싶은 행동을 하는 순간들이 있다. 무대에 거울이 있는데, 그 안에서 옛날을 회상하거나 상상에 잠기는 장면들이 있다. ‘아, 저 사람이 지금 상상을 하는구나’ 하고 의심하면서 보면 훨씬 재미있을 거다. 그런 장면들을 눈여겨보시면 좋겠다. -
- ▲ 연극 '더 마더(THE MOTHER)'에서 ‘안느’ 역을 맡은 배우 정애리. ⓒ천의현기자
Q.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AI 배우까지 등장했다. 오래 무대를 지켜온 입장에서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나.A. 다들 굉장히 어렵다고 한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정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다. 연기마저 AI가 하기 시작하니, 한편으론 당분간 ‘사람이 하는 무대’는 사라지지 않겠구나 싶기도 하다. 연극은 AI가 살아낼 수 없으니까. 우리는 어차피 선택받는 입장이라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할 순 없다. 다만 주어지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나는 됐어’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왜 이렇게 바뀌는지 관심을 갖고 알고는 있어야, 그 흐름 안에서 나는 또 어떻게 다르게 연기할지 고민할 수 있다.Q. 관객이 이 작품을 보고 하나쯤 기억하거나 느꼈으면 하는 게 있다면.A. 배우 정애리에게는 ‘참 괜찮은 배우네’ 한마디면 된다. 배우로서 그게 최고의 칭찬이다. 작품 전체로는 ‘나도 내 주변을, 내 인생을 한번 돌아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져가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정답은 없다. 그냥 ‘아, 잘 봤다’ 하셔도 충분하다. 나는 그것도 좋은 충전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보고서 꼭 무언가를 얻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위로, 그거면 문화가 줄 수 있는 큰 선물이라고 본다.Q.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A. 많이 와주셨으면 좋겠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 인물을, 최선을 다해 보여드리려 한다. 오랜만의 무대라 더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아무리 맛있는 밥상도 함께 둘러앉아 먹을 때 진짜 좋은 밥상이 되지 않나. 오셔서 같이 시간을 나눠주시면, 그게 우리가 또 다른 더 좋은 무대를 만들 원동력이 된다.





